안녕하세요. 박소현 변리사입니다.
동화 속 ‘라푼젤’이 누군가의 독점 상표가 될 수 있을까요? 직관적으로는 “수백 년 된 공공영역 캐릭터인데 당연히 안 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드실 겁니다. 그런데 2026년 4월 20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이 상식을 흔드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판결이 아니라 ‘심리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연방대법원은 Curtin v. United Trademark Holdings(사건번호 25-435)에서 상고허가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certiorari denied), 이로써 연방순회항소법원(CAFC)의 2025년 5월 22일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습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대법원은 “라푼젤은 상표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 사건에서 다뤄진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가 이의신청을 할 수 있는가”라는 절차 문제였고, 정작 라푼젤이 상표로 기능하는지에 대한 본안 판단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 왜 하필 ‘라푼젤’이 문제가 됐을까요?
United Trademark Holdings(이하 UTH)는 미국 특허상표청(USPTO)에 ‘RAPUNZEL’이라는 문자상표를 인형과 장난감 피규어(니스분류 28류)를 지정상품으로 출원했습니다. 심사관은 이를 통과시켰고 이의신청을 위한 공고가 이뤄졌습니다.
이때 법학교수이자 동화 인형 수집가인 레베카 커틴(Rebecca Curtin) 교수가 나섰습니다. 그녀가 든 이유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라푼젤은 보통명칭(generic)이자 기술적 표장(descriptive)이며, 출처표시기능(failure to function)이 없고, 출원 과정의 진술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죠.
쉽게 말해 “소비자가 ‘라푼젤 인형’이라고 할 때 그건 특정 회사 제품이 아니라 그냥 ‘라푼젤이라는 동화 속 소녀 인형’을 부르는 말”이라는 논리입니다. 어떤 회사가 ‘백설공주’를 인형 상표로 독점하겠다고 나선 상황을 떠올리시면 감이 오실 겁니다.
그런데 이 주장들은 단 하나도 심리되지 않았습니다. 상표심판원(TTAB)이 그 앞 단계에서 문을 닫았기 때문입니다.
2. 왜 이 싸움이 ‘당사자적격’에서 끝났을까요?
미국 연방법원은 Lexmark Int’l v. Static Control Components(2014) 판결 이후 상표 분쟁에서 ‘이해관계 영역 테스트(zone-of-interests test)’를 엄격하게 적용해 왔습니다. 이 테스트에 따르면 이의신청을 하려는 사람은 랜햄법이 보호하려는 상업적 이해관계 안에 있어야 하고, 등록으로 인한 피해와 직접적 인과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커틴 교수는 “나는 동화 인형을 사는 소비자이고, 상표가 독점되면 가격 상승이나 선택권 제한이라는 피해를 입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연방순회항소법원은 만장일치로 이를 배척했습니다. 소비자가 입는 피해는 “판매자가 먼저 겪는 피해의 하류(downstream)에 있는 것”이어서 “너무 멀다(too remote)”는 논리였습니다.
법이 보호하는 이해관계 영역 안에서 상업적 이익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영향을 받는 상업적 주체뿐이다.
연방순회항소법원 판결 요지
결국 미국에서는 ‘소비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상표 이의신청을 할 수 없습니다. 이의신청은 그 시장에서 경쟁하는 사업자, 유통사, 제조사의 몫이 됐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려 해도 법정 문턱을 넘지 못하는 구조인 셈이죠.
3. 그렇다면 라푼젤은 이제 완전히 UTH의 것일까요?
여기서 신중해야 합니다. 언론 보도만 보면 “라푼젤이 특정 회사 것이 됐다”로 읽히지만, 제 견해로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 등록은 본안 심리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보통명칭인지, 기술적 표장인지, 출처표시기능이 있는지는 여전히 미결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제도에는 등록 이후에도 다툴 수 있는 등록취소심판(cancellation)이라는 길이 열려 있습니다.
즉 이번 결정이 정한 것은 “소비자는 못 다툰다”이지 “아무도 못 다툰다”가 아닙니다. 인형 시장에서 실제로 경쟁하는 사업자가 나선다면, 커틴 교수가 제기했던 그 논점들은 다시 심리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이 남긴 것은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미뤄진 결론에 가깝습니다.
4. 한국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요?
이 대목이 우리 실무자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한국은 미국과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상표법 제60조 제1항은 “상표등록출원에 대한 출원공고가 있을 때에는 누구든지 출원공고일부터 2개월 이내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합니다. 문언 그대로 ‘누구든지’이므로, 경쟁사업자가 아닌 일반 소비자나 시민단체도 이의신청 자격 자체는 인정됩니다. 커틴 교수가 한국에서 같은 일을 했다면 적어도 문턱에서 막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자격이 있다는 것과 이긴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본안에서는 식별력이 쟁점이 됩니다. 공공영역 동화 캐릭터명이 인형류로 출원된다면 상표법 제33조 제1항 제3호(성질 표시)나 같은 항 제7호(기타 식별력 없는 표장), 사안에 따라서는 제34조 제1항 제4호(공서양속) 등이 검토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공공영역이니 무조건 등록 불가”라고 기계적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름이 어느 정도로 공중에게 알려져 있는지, 지정상품과 얼마나 밀접한지에 따라 결론이 갈립니다. 같은 ‘라푼젤’이라도 인형에 붙일 때와 예컨대 건축자재에 붙일 때는 판단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5. 브랜드 실무자에게 남는 세 가지
첫째, 해외에서는 ‘본안 논리’만큼 ‘절차의 틀’이 중요합니다. 한국에서 당연히 가능한 이의신청이 미국에서는 막힐 수 있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미국 시장에서 남의 부당한 출원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의신청 자격부터 확보되어 있는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현지 유통 계약이나 실제 판매 실적처럼 ‘상업적 이해관계자’임을 보여줄 근거가 있어야 문이 열립니다.
둘째, 공공영역 소재는 기회이자 위험입니다. 동화·신화·역사 인물의 이름은 대중에게 친숙해 브랜드 소통력이 뛰어납니다. 그런데 친숙하다는 장점이 곧 식별력이 약하다는 단점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게다가 국가별로 등록 가능성이 천차만별이라, 미국에서 등록됐다고 한국·유럽에서도 된다는 보장이 전혀 없습니다.
셋째, 등록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UTH는 출원 후 심판·항소·상고를 거치며 여러 해를 버텼습니다. 그 사이 적지 않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도 등록취소심판의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브랜드가 정말 중요하다면 출원 단계부터 분쟁 가능성을 계산에 넣고 장기전을 설계하셔야 합니다.
■ 참고자료
· 사건 : Curtin v. United Trademark Holdings, Inc. (미국 연방대법원 사건번호 25-435) — 2026. 4. 20. 상고허가 신청 불허 / 연방순회항소법원 2025. 5. 22. 판결(만장일치) 확정
· 해설 : IPWatchdog 「Supreme Court Denies Cert in Rapunzel Trademark Case」 · Finnegan · Patently-O 「Once Upon a Time, Consumers Had Standing」
· 선례 : Lexmark Int’l, Inc. v. Static Control Components, Inc. (U.S. Supreme Court, 2014)
· 국내 근거 : 상표법 제60조 제1항(이의신청), 제33조 제1항 제3호·제7호(식별력), 제34조 제1항 제4호
· 관련 글 : 전통 문양도 상표가 될까 — 루이비통·몰리티 사건이 남긴 질문
정리하며
이번 사건은 ‘공공영역 캐릭터를 독점할 수 있는가’라는 소재 차원의 문제로 읽히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결론을 낸 것은 그 질문이 아니라 “그 질문을 던질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였습니다.
상표 제도는 나라마다 이 문을 다른 넓이로 열어 둡니다. 미국은 상업적 이해관계자에게만, 한국은 누구에게나. 어느 쪽이 옳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문을 넓게 열면 공익적 감시가 가능해지지만 남용의 여지도 커지고, 좁게 닫으면 절차는 효율적이지만 이번처럼 아무도 묻지 않은 채 권리가 서 버리는 일이 생깁니다.
브랜드를 운영하시는 분들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해외 진출을 준비하실 때는 등록 가능성뿐 아니라 그 나라의 이의신청·심판 제도까지 함께 보시라는 것입니다. 상표는 출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등록 이후의 분쟁에서 살아남아야 비로소 자산이 됩니다.
사랑특허법률사무소
박소현 대표변리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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